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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er DG

좌, 우

글쓴이: 이대근 (ㄷㄱ)


국가의 성립에 관한 여러 학설이 있지만
그중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초등학교 사회책에서도 가르치는) 하나는 루소의 사회 계약설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사람들이 맺은 최소한의 계약.
그 계약조항을 Axiom 삼는 사회의 규범이 생겨나 오늘날의 법률이 되었고
도덕, 법규, 계약 등 사회 계약의 부속물로써 개인을 규제하는 모든 방편들은 사실
"계약된 사회" 의 구성원인 개인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인 것.
 
다시 말해, 어떤 도덕적인 규범이나 법률이 사회 계약의 본질에 비추어보아 위배될 때에는
그것이 현재까지 어떤 순기능을 가져왔는지와 무관하게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될 사생아인 것이다.
만약 어떤 국가가 '국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국민을 옥죄는 법규를 제정한다면
그 국가를 성립한 국민의 계약이 의도한 바가 아닐 것이므로 이는 국가의 명백한 월권.
범죄자들을 교정하기 위해 교도소가 있는 것이지
교도소가 있기에 거기에 집어넣을 범죄자를 양산해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때에 따라 개인의 사적 자치를 옹호하는 것과 개인들의 집합체로써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가 생긴다.
예컨대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개인 스스로 중화학무기로 무장하는 것보다는
'국가' 차원의 집합적인 방위체계를 갖추어 국경 주변에 강화된 수비력을 준비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세련된 시스템인 것이다. (again, 국경 주변에만 투자하면 되니까)
모든 국가가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몇몇 국가는 국민의 사적 자치를 제한하는 방법을 통해
성인, 그중 남자, 혹은 성인이 아닌 구성원에게 '병역의 의무' 를 부과하는 것이 한 예이다.
국민이 자신의 자치를 일정 기간 제약받는 불편함을 감수함으로써
외적의 침입이란 엄청난 기회비용을 차단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
 
다만 이러한 사적 자치의 제한, 즉 '개인의 자유의 제한' 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하는 것은
각 국가가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 정해야 하는 계약서의 남은 부분이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제2조의 '정부를 참칭' 하는 행위가 과연 우리 국민의 안전을 해치는 죄인지는
애초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 입법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기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많은 현대 국가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경제적' 인 효율성을 위해
모든 구성원의 총의를 모으는 대신 대의기관인 국회를 구성하여 법령을 제정하기도 하며
전근대 국가에서는 그마저도 없이 군주 (monarch) 또는 귀족 (aristocrats, oligarch) 의 판단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무제한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현대 국가들이 승계한 이들 전근대 국가의 기본적인 정신엔 큰 변함이 없어서
오늘날에도 몇몇 국가의 정부에서는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비경제적' 이라고 치부하거나
그나마 대의기관인 국회에서의 심의조차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며 원천봉쇄하려는 형편이다.
 
이렇게 하여 구성원 모두의 합의를 구하지 못한 법령이 제정되고
그 법령에 기반하여 어떤 정책적인 -경제를 살리기 위한- 행위가 집행된다 한들
국민들이 그 집행에 동의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를 형성한 계약은 구성원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맺어진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얼핏 '비효율적' 이고 '비경제적' 으로 보이는 구성원의 의사를 모으려는 시도가 실은
그 모든 정치적 수사와 생색내기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방편이라는 얘기다.
 
이것을 증명하는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찾기 어렵지 않다.
1997년 문민정부와 여당인 신한국당은 노동계와 야권의 반대에 불구하고 노동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동법 개정이 불러온 것은
노동계의 총파업과 야권의 정치 일정 보이콧으로 이어진 엄청난 생산력 손실이었을 뿐이다.
간단하지만, 가장 선명한 '구성원의 합의를 얻는' 절차를 포기한 기회비용 되겠다.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강하고', '빠른' 정부를 설파하는 이들은 자신을 신자유주의자라 한다.
진정한 신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의 사적 자치를 극대화하는 길을 올바로 짚어야 할 것이다.
 
동호회나 클럽의 운영진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필요' 하지만 그들을 위시하여 클럽활동이 돌아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국가란 주체인 구성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객체이자 도구일 뿐이며
'국가' 그 자체를 대변하려는 모든 시도는 곧 그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관료주의로 통하는 길이니까.
그런 면에서 신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닮아 있다. 결국 사상의 극단이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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