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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er DG

한스 하케를 생각하며

Author : Daegue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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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상가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리영희나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이름을 대는 것이 딱히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중 '넘버 원'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당황스럽게도, 전통적 의미에서의 사상가라고 보기는 어려운 한스 하케Hans Haacke. 미술가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미술품을 전시할 권리'가 어떤 다른 가치체계와 독립된 '미술' 그 자체의 담론적 가치보다 외려 당대의 driving force에 좌우되는 현실 속에서 미술이 어디까지 미술다울 수 있는지, 미술을 미술답지 못하게 왜곡하는 외력과의 대결을 불사해서라도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게 아닌지를 두고 모두가 번민할 때 끊김없이 '투사적' 작품활동으로 목소리를 낸 작가가 바로 그였다.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한 건 어느 수업에서의 Condensation Cube. 하나의 미술품이란 것을 정의할 때, 그 범위를 미술가가 창조한 오브젝트 그 자체로 한정하자면 그저 물이 든 아크릴상자일 뿐인 이 작품은, 그러나 전시된 장소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닫힌 계 내에서 물이 상전환을 하며 순환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며, 나아가 이러한 과정을 이끌어내는 '온도와 습도'라는 조건 역시 관람객의 체온, 수, 밀도, 그들의 호흡과 대화 등 모든 요소에 의해 비선형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Condensation Cube를 논함에 있어 '물이 든 아크릴상자' 만을 떠올리는 것은 배후의 더 큰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생각함에 있어 '나'라는 존재의 법적 & 물리적 경계는 매우 뚜렷하기에(현대물리적 관점에서 이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겠지만 여기서만큼은 고전물리의 관점을 따르자)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는 내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정의된 '나'와 그로부터 유리된 모든 배후들, 이 둘은 과연 아무런 유기적 연계 없이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라면 '나'의 정의는 과연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나'들의 상당수는 마치 그들이 그들 주변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인 듯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선이라기엔 지향점이 궁극적으로 '선'을 향한 것도 아니기에 이것은 위악이다. 차라리 우리들보다 '위선'에라도 가까운 부류가 한스 하케, 그 외 우리가 우리 주변과 유리되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몇몇 소수가 아닐런지. 훗날 평생을 돌아봤을 때 내가 위선자라도 되었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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