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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er DG

Rise of the Virgin Queen

Author : Daegue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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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자베스>를 서문사 수업 이래 몇년만에 다시 봤다. 아래 대사들이 기억에 남는다.


1. "Why we must tear us apart for this small question of religion?"

2. "I will have one mistress here, and no master!"

3. "I am my father's daughter."

4. "I have become a virgin."


공주이지만, 어머니 앤 불린이 부왕 헨리 8세의 첩이었고 설상가상 아들을 못 낳은 죄로 참수당했다. 극중에선 종교 차이로 희생된 것으로 왜곡돼 있지만 성공회의 등장 자체가 헨리 8세가 조강지처를 버리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분탕질한 것임을 생각할 때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어쨌든 부왕의 치세기에 이미 사생아로 오독된데다 본처 소생이자 독실한 구교 신자인 언니 메리가 왕위를 계승해 당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실제로 반역 혐의로 런던 탑에 유폐되기도 했다) 기적적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당사자로써는 이미 백년쯤 지난 것처럼 느껴졌을 이 세월이 러닝타임의 첫 28분 안에 끝이 난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그 다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앤 불린이 종교 대립의 희생양인 양 미화되었듯 영화는 아주 작은 조작 하나로 세계관을 실제 역사와는 평행우주 수준으로 바꿨는데, 바로 엘리자베스의 '신교'를 성공회가 아닌 프로테스탄트로 치환한 것이다. 사실 그 시기의 신교가 프로테스탄트였건 성공회였건 구교와 극심하게 반목한 것이 엄연한 사실인 만큼 극의 전개에는 문제가 없었겠으나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Virgin" 이란 키워드를 보다 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해 깔아 둔 설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신교를 프로테스탄트로 전제함으로써 의도한 고대비의 객체는 "성모 숭배" 였을 것이다. 자세한 얘기는 마지막 문단에서.


즉위 후 상당한 시간 동안 -대략 러닝타임의 50%가 지날 때까지- "엘리자베스 부인" (레이디 엘리자베스 : 신하들이 미혼 여성인 그녀에게 왕의 존칭을 붙이지 않는다) 이 보여주는 통치 기술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신하들도 여왕 자체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여왕의 여성성을 매개로 강대국과 국혼을 주선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이 시점까지 영화는 엘리자베스의 "국정경험 없음"을, 다시 말해 얼마나 준비 안 된 왕이었는지를 주지시킨 뒤 곧이어 그녀의 첫 업적을 그려내는데 마침 의미심장한 교식 통일령(Act of Uniformity)의 도입이다.적어도 러닝타임 반절이 지나기까지 엘리자베스가 보여준 "비범함" 이라곤, 1번 대사로 드러난, 공주 시절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보인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한 실로 -당시로써는- 비범한 관대함밖에 없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상징적인 첫 걸음인 것이다. 이 최초의 정치적 승리 후 엘리자베스는 2번 대사를 읊는다.


부군을 두지 않겠다는 선언 이후 신하들의 국혼 요청이 잦아들고, 때마침 프랑스 왕비 겸 스코틀랜드 섭정인 메리 드 기스가 양국간의 국혼 무산에 앙심을 품고 엘리자베스의 독살을 기도하다 발각되어 되려 암살되는 일이 있었다. 서서히 권력의지를 다지는 여왕과 후계 없는 왕권을 넘보는 신하들 사이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3번의 대사가 등장한다. 이어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모든 정적을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극중 이를 전후로 엘리자베스를 일컫는 호칭이 "공주", "부인"에서 "폐하"로 급격히 이행한다. 러닝타임의 9할이 지나서야 진짜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만인지상이 된 엘리자베스조차 넘어설 수 없던 단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성모(Virgin)였다.


수많은 구교도가 아버지의 치세기에 죽었고, 언니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을 죽이려 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집권하고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국내의 모든 적을 제거했으나 신민들이 성모를 경배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모든 순교자들은 성모를 위해 죽었고, 구교의 시대가 끝났지만 신민들은 아직 성모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그들에겐 만질 수 있는 신이 필요합니다." 엘리자베스는 마침내 개인(여성)으로써의 지난 삶과 작별하고 머리를 자르며 대단히 중의적인 4번 대사를 읊는다.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도 물리칠 수 없었던 성모의 권위를, 동시에 프로테스탄트로써 오랜 숙원과도 같았을 구교의 뿌리깊은 상징을 넘어서기 위해 여왕은 스스로 동정녀이자 성모가 되었다. "The Virgin Queen"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