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진화

Author : Daeguen Lee




모든 언어간 관계에서 공통적으로, 한 언어의 단어가 뜻하는 바와 100% 일치하는 동의어를 다른 언어 내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과감히 불가능하다고 단언해도 이를 틀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하나의 시그니파이어에 이어진 시그니파이드가 명료하게 분절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예 : 사과 - apple) 개념 그 자체를 추상하는 '개념들의 합집합' 인 경우가 많은데 서로 전혀 다른 기원을 갖는 이 집합들이 각자가 속한 언어의 진화과정 내에서 우연히 결과적으로 동치이게끔 발달해 왔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이라는 우리말 단어가 그 자신이 속한 글의 맥락에 따라 영문의 man으로 옮겨지기도 하며 human이 되기도, mankind나 human-being이 되거나 때로는 homo라는 속명으로 쓰여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 품사가 명사일 때는 그나마 간단한 축에 속한다.


한편 완전한 동의어가 아님에도 통번역상 자연스레 동치로 간주되는 단어쌍도 있다. 개념 - concept이 대표적이다. ("개념"이란 말이 자주 나오니 좀 정신사납다.) 대개 문헌을 번역함에 있어 개념이란 단어를 마주했을 때 이를 concept으로 옮기는 것이나 그 역의 경우 십중팔구는 올바른 번역례가 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음식점을 설명할 때 '그 음식점은 concept이 없어' 라고 전하는 것과 '개념이 없어' 라고 하는 것의 뉘앙스는 전혀 딴판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concept의 음독(을 다시 받아쓴) '컨셉'은 개념, concept 둘 어느 쪽과도 중첩되지 않는 독자적인 심상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컨셉' 은 concept의 우리말 음차를 넘어서 일정 부분 우리말 단어로써 하나의 시그니파이어 직무를 대행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슷한 예로는 사실 - fact와 최근 부쩍 널리 쓰이게 된 '팩트'의 관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팩트란 더 이상 '사실'의 동의어가 아닌, 거기서 한겹 더 벗겨낸 무언가를 시그니파이드로 삼는 우리말로써의 고유한 시그니파이어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든 외래어/외국어의 상당수가 실은 외래어/외국어로써가 아니라, 비록 그것들과 발음이 같을지언정, 우리말의 일부로써 우리말 내에 있는 수많은 어휘들(이 대표하는 시그니파이드들)의 여집합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말 어휘의 여집합이란 그것(=공백)이 실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화자 개인의 어휘지식의 부족에 기인하여 실재하는 어휘로 이미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것을 우리말화된 외래어나 외국어로 치환해버리는 것일 수 있지만 어느 쪽이건 그 기능의 본질은 우리말의 파괴보다는 오히려 우리말을 더 촘촘하고 풍성하게 하는 데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미 실존하는, 그러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우리말 어휘가 우리말화된 외래어/외국어에 밀려 EBS e-지식채널의 소재쯤으로 전락할 (부제 : 우리의 잊혀진 단어들) 가능성 역시 상존한다. 어쨌든 이런 형태의 언어생활(진화라고 해야 할까?)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추세가 되어버렸고, 우리들은 우리말의 커버리지를 넓히는 데 모두 조금씩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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