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대로 발췌하는 글은 웬만하면 다시 안 올리려 했지만...






  "기업은 독재적 성격을 띤 기관입니다. 현대의 다국적 기업들은 "유기적 존재가 개인에 앞선 특권을 갖는다"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됩니다. 그런데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두 가지 형태의 독재체제, 즉 볼세비즘과 파시즘도 바로 이런 원칙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요컨대 이 셋은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리를 인정한 전통 자유주의에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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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 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거대한 민간 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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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나라가 파산 상태에 빠지면 IMF가 재정 지원에 나섭니다. 그런데 IMF가 인도네시아에 돈을 보낸다고 했을 때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와 대금업자, 쉽게 말해서 은행에게 돈이 넘어갑니다. 어중간한 반(半)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투자의 위험도가 클수록 수익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이 둘은 언제나 한 쌍입니다. 요컨대 지갑을 두둑하게 하려면 위험한 분야에 투자해야 합니다.


  하지만 위험한 곳에는 최소한의 돈을 투자하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그런데 IMF는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언젠가부터 투자자들은 인도네시아나 타일랜드처럼 위험한 나라들에 서슴없이 투자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즉시 해당국의 공공자금이 투여되니까요. 이 때문에 경제학자들이 '모럴 해저드'라 칭하는 현상이 심화될 뿐입니다. 이런 체제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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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년 전의 자본주의는 근본에서 가족 중심의 자본주의였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런 형태의 자본주의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건너간 자본주의가 19세기 동안 천천히 변모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경제가 붕괴되면서 자본주의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기업계는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이런 변화과정을 추적한 <거대한 변환>이란 유명한 책을 발표했습니다. 기업들은 트러스트를 결성하고 합병을 통해서 시장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업에는 어떤 법적 권리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기업적 행위를 중심으로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다리를 건설하려 할 때 여러 사람이 연대해서 공권력의 허락을 얻어 제한된 책임을 지닌 기업을 세웠습니다. 19세기 동안 이런 기업들은 법정의 판결을 통해 조금씩 권한을 확대시켜 나아갔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기업, 즉 기업이 법적 지위를 얻은 것은 20세기 초였습니다. 사법부의 판결 덕분이었습니다. 미국의 연방최고법원이 기업에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 준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이런 판결은 독일 철학, 즉 유기적 조직체에 대한 신헤겔 철학의 해석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독재체제들도 바로 이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중략)


  하여간 20세기 초에 기업은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후로도 기업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그 권리를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1990년에는 새로운 무역협약이 맺어지면서 기업의 권리는 더욱 확대되어 기업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기업은 법원에 한 나라를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중략)


  새로운 무역협정들이 존재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독재적 조직체, 즉 이미 불로불사의 지경까지 올라간 기업의 권리를 확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기업은 인간의 권리를 훨씬 넘어서 국가의 권리까지 누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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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부주의는 한 마디로 해석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하지만 고전 자유주의의 직계, 즉 자본주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무정부주의가 있습니다. 이런 무정부주의자들은 국민에게 자유의 열매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조직의 결성을 촉구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시대의 변화에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노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형태의 지배구조를 찾아내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물론 누가 보아도 정당성을 지닌 지배구조가 있습니다. 예컨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는 지배구조는 부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관계를 전복시킬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개인의 관계부터 국제 관계까지 그 차원을 따질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지만, 이것이 무정부주의 사상의 기본 틀입니다."




- Noam Chomsky,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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