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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er DG

미국 헌정의 결함, 역사의 아이러니

Author : Daegue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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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헌정의 결함 1 : 표의 비등가성


대단히 복잡한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크게 각 주별 선거인을 뽑는 단계와 선거인이 회합해 대통령을 뽑는 단계로 나뉜다. 이러한 간선 대통령이 최소한의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선거인단 구성의 합민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간선제의 큰 틀을 전제로, 현존하는 여러 선거제도에 기초해 선거인선거를 재구성하자면 어떤 제도를 고안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현 헌정은 어떤 측면에서도 모범적인 것이 아니다.


일차로, 각 주별로 선거인단을 선출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해 각 주별 ‘표의 등가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미국 헌법은 각 주당 동일하게 2인씩의 의원을 선출해 상원을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대통령선거마저 이와 같다면 인구가 많은 주에 사는 유권자들의 참정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다행히 미국 헌법은 대통령선거인단의 구성을 그와 같이 규정하지는 않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딱히 그것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각 주별 선거인수를 그 주의 상하원의원 총수와 동수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과 달리 주의 인민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은 그 주의 인구에 비례해 각 주별 의석을 할당하는 것이 미국 헌법의 주요한 원칙이다. 하지만 헌법은 그와 동시에 ‘모든 주는 최소한 1명의 하원의원을 선출한다’는 원칙을 병기함으로써 스스로 표의 등가성을 훼손하는 모순을 낳았다. 예컨대 하원의원 1명을 선출하는 와이오밍주와 53명을 선출하는 캘리포니아주를 비교했을 때 실제로 캘리포니아주의 인구가 와이오밍주의 53배를 훨씬 능가한다는 점 뿐만 아니라(실제로는 약 66배쯤 된다), 똑같이 1명씩의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몬타나주와 와이오밍주의 인구도 실제로는 두배 가까이(몬타나주 101만명, 와이오밍주 58만명) 차이가 난다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미국 헌법은, “심지어” 여기에 상원 의석수를 합산함으로써 그 불비례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제가 최소한의 민주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 필요한 표의 등가성을 보장하려면, 선거인단 정수를 확대해 과소평가된 주에 더 많은 의석을 할당하거나, 적어도 하원 의석수를 기준삼아야 했을 것이다.



2. 미국 헌정의 결함 2 : 선호의 불비례성


설령 선거인단 규모가 인구에 비례하지 않더라도, 각 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선호의 분포가 비슷하다면 선거결과에 이를 적절히 투영할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불비례성을 다소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호를 가장 이론에 가깝게 담아내는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인데, 예컨대 각 주별 대통령후보의 득표율에 따라 그 주에 할당된 선거인 수를 배분하면 사실상 직접선거의 효과를 가미할 수 있다.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차선책으로 현행 고정명부제 대신 개별 선거인에 대한 직접투표의 도입을 전제하고 각 주를 단위로 하는 대선거구제를 채택하거나, 그마저도 못 할 상황이라면 결선투표를 도입해 절대다수제를 구현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선거인선거 제도는 단순다수제라는 데 이차적인 결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대안들 중 비례대표제와 대선거구제는 소수대표제로서 여타의 제도에서와 같이 결정된 ‘다수득표자’ 뿐만 아니라 차점자들까지 당선권에 둠으로써 유권자가 행사한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최소화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면, 절대다수제는 ‘다수득표’란 잣대로 단 하나의 안을 고를지언정 아쉬운 대로 최대한 많은 선호를 반영하는 데 의의가 있다. 1차 선호를 반영한 최초 투표에서 후보 A, B, C가 각각 45%, 35%, 20%를 득표했을 때 단순다수제 하에서는 A가 당선자가 되지만, 결선투표제를 도입할 경우 적어도 C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2차 선호가 재반영될 여지가 남는 셈이다. 예컨대 A 후보가, 비록 가장 많은 유권자들의 1차적인 선호를 받았으나 그 밖의 55%로부터 강력한 반대를 받고 있다면 결선투표에서 이를 걸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기하자면 미국은 모든 종류의 공직선거에서 단순다수제인 다수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어느 주의 유권자 과반수로부터 지지받지 못한 후보가 그 주의 선거인을 독식하거나, 전국 유권자 과반수가 지지하지 않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거나, 심지어 최다득표자가 아닌 채 대통령이 되는 헌정의 ‘오작동’이 시작된다.


이렇듯 결점이 많은 미국의 헌정 제도이나, 이론상의 결점을 보완할 장치를 고안해 시뮬레이션해 보면 의외로 실제 선거결과와 비슷하게 수렴하는 곳이 또한 미국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200년이 넘는 미국의 대통령선거사에 유권자의 투표에서 최다득표자가 아닌 후보가 당선자로 결정된 사례가 단 두 번‘밖에’ 없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왜곡이 있었어야 했다는 뜻으로, 이렇듯 이론적인 결함을 보정해주는 비밀은 의외로 공적인 제도 바깥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양당제’이다.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범주를 자연스럽게 두 가지로 압축함으로써, 단순다수제를 채택했음에도 사실상 절대다수제로 운용되어 온 “부작용”이 헌정의 결점을 보완한 것이다.


이는 거꾸로, 미국 특유의 양자 구도가 깨졌을 때 헌정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지금부터 소개할 이야기는 미국 헌정사상 단 한차례 발생한, 그러나 이론적으로 발생 가능하다고 예측되어 왔던 거의 모든 ‘헌정 위기’가 집약되고 매관매직 스캔들까지 가미된, 어느 해의 대통령선거에 관한 것이다. 때는 1824년 가을이었다.



3. 1824년의 선거 : 제1차 애덤스-잭슨 매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시작된 건국 이래의 공화당/연방당 양당 체제는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의 ‘연방제’가 성공적으로 착근하며 무너졌다. 연방당원들의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에서 사실상 여당이던 연방당이 와해되고, 정계 전체가 신설 “민주공화당” 1당 체제로 재편되던 시대적 상황 아래 1824년의 대통령선거가 다가왔다.


대부분의 유력한 정치인이 민주공화당이라는 간판 아래 모인 상황에,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이 열렸으나 예비후보 진영간의 이견으로 파행을 거듭하다 민주공화당 의원총회에서 현직 재무장관인 윌리엄 크로포드를 대통령후보로, 앨버트 갤러틴을 러닝메이트인 부통령후보로 선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부터 소수 국회의원끼리 비민주적으로 후보를 결정했다는 비난이 쇄도했고 설상가상 부통령후보 갤러틴이 뇌졸중으로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후보 선출이 사실상 무위로 돌아간 가운데 나름대로 의원들, 그리고 출신 주의 지방정계 등을 지지기반 삼는 후보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여당이자 원내 제1당, 나아가 사실상 유일한 정당인 민주공화당에서만 11명의 후보가 대권을 노리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앞서 의총에서 추대된 재무장관 크로포드를 필두로 다른 나라의 국무총리에 비견되는 직위인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 국방장관 존 컬훈, 해군장관 스미스 톰슨, 대법원장 존 마샬,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 뉴욕주지사 드와이트 클린턴 등 행정/입법/사법 3부요인이 사실상 총출동하고 거물급 지방정부 수장까지 가세한 유례없는 대선 캠페인이 개막되었다. 그 결과가 어느 후보도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귀결된 것은 그리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혼란한 와중에, 선거일 직전 부통령으로 눈을 낮춰 '하향지원'한 국방장관 컬훈은 무난히 부통령직을 거머쥠으로써 이변의 또 다른 한 단면을 차지했다.


앞서 길게 설명한 바 있듯, 특이하게도 모든 공직선거가 단순다수제를 채택한 미국이지만 “단순다수제”로 선출된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것만은 “절대다수제”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대통령에 당선되려면 선거인단 총원의 과반수를 득표해야 한다. 당시 유권자들의 직접투표 결과 총 36만여 표 중 앤드류 잭슨이 15만여표를 득표해 42%의 득표율을 기록해 1위를 차지했으나 선거인단은 총원의 3분의 1가량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국무장관 애덤스가 11만여표로 득표율 31%, 그 밖에 하원의장 클레이가 득표율 13%, “공식적으로” 민주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추대되었던 재무장관 크로포드가 득표율 11%로 꼴지를 기록하는 등 누구도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여기서 미국 헌법에 규정된, 그러나 사실상 사문화된 규정이었던 ‘비상선거’ 조항이 발동되었다.



4. 비상선거(Contingent Election) : 하원이 대통령을 뽑다


미국 수정헌법 제12조는 선거인단 과반수가 대통령/부통령 선출에 실패하는 경우에 대비해 다음과 같은 안전망을 설치해 두었다.


“선거인단의 투표에서 대통령당선자가 나오지 않은 경우 하원이 다득표순으로 3인을 대상으로 대통령을 선출한다.”

“선거인단의 투표에서 부통령당선자가 나오지 않은 경우 상원이 다득표순으로 2인을 대상으로 부통령을 선출한다.”


특이한 점은, 모든 상원의원이 동등한 1표를 행사해 과반수의 투표로 당선자를 결정하는 부통령 비상선거와 달리 대통령 비상선거에서는 각 하원의원간의 의결권의 등가성마저 무시된다는 점이다. 규정을 더 상세히 적자면 아래와 같다.


“하원이 대통령을 선거하는 경우에, 하원의원은 그 소속주를 단위로 하여 각 주당 한 표를 행사하고, 각 주의 투표는 그 주에 소속한 하원의원이 다수결로 결정하며, 당선자의 결정에는 전체 주 3분의 2이상에서 1명 이상의 하원의원이 출석한 회의에서 전체 주 과반수의 투표를 얻어야 한다.”


이에 따르면 1명의 하원의원을 뽑는 와이오밍주나 53명의 하원의원을 뽑는 캘리포니아주나 “동등한” 한 표를 대통령선거에서 행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캘리포니아주 출신 하원의원의 투표권은 와이오밍주 출신 하원의원이 가진 것의 53분의 1에 불과하게 된다. 의원 선거 단계에서 이미 한 차례 왜곡된 표의 등가성이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극적으로 왜곡되는데, 심지어 "주"가 아니란 이유만으로 의회 내 의석을 배정받지 못한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60여만명의 주민들은 참정권이 사실상 박탈되어 버린 어이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1824년에 시작한 대선 캠페인이 어느덧 해를 넘겨 1825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선거를 앞두고 전국 득표수 3위를 기록했던 하원의장 클레이가 석연찮은 이유로 돌연 대선 포기를 선언한다. 그리고 마침내 비상선거일이 되어 총 216명의 하원의원이 각 주별로 “패키지” 되어 당시 미국 연방에 가맹한 주 수와 동수인 “24표”를 행사한 선거 결과 놀랍게도 1차 투표에서 2위에 머물렀던 국무장관 애덤스가 당선되었는데, 그의 득표수는 전체 주의 과반수에 턱걸이한 13표에 불과했으며, 하원의원수로 환산하면 216명 중 87표로 원내 과반수에도 미달하는 것이었다. 주별 하원의원을 “패키지”로 묶어 표결하도록 한 조항이 아니었다면 당선될 수 없는 상황에, 많은 인구로부터 지지받지 못한 대신 인구가 적은 여러 주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 그의 승인이었다. 요약하자면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도 득표하지 못한 동시에 하원 의석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의원들의 지지로 당선된, 애덤스 정부의 출범 이면에는 이른바 “더러운 거래” 가 있었다.



5. 더러운 거래 : 역사의 아이러니


비상선거 직전, 필라델피아의 한 일간지인 ‘콜럼비아 옵서버’는 한 하원의원의 익명 투서를 대서특필했다. 자못 충격적인 이 투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권자 직접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던 하원의장 클레이가 비상선거에 불출마하는 대신 2위였던 애덤스 장관에게 자신이 장악한 하원 내의 지지세력을 몰아 주는 조건으로 차기 정부의 국무장관직을 보장받는 밀약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공식적인 조사도 개시되지 못한 채 비상선거가 속개되었고,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마저도 유야무야되었으며,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밀약설에 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않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편 취임 직후 클레이를 내각 2인자인 국무장관에 지명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밀약의 존재를 시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스캔들이 헌정의 결함을 보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면 그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 할 것이다. 갖가지 ‘헌정 사상 처음’ 이 속출한 대선과 이어진 비상선거에서 석패한 앤드류 잭슨 상원의원 지지자들은 애덤스-클레이의 정치공작에 깊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민주공화당 1당 체제가 무너지는 씨앗이 되었다. 애초 양당제의 붕괴로부터 미국 헌정 제도의 모순이 극대화되었음을 생각할 때 바로 그 모순에서 양당제로 되돌아갈 모멘텀이 생긴 것은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애덤스가 집권한 4년 내내 민주공화당 내 잭슨 지지파는 “더러운 거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급기야 애덤스 대통령의 임기 중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애덤스의 공화당/잭슨의 민주당으로 분당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다음 대통령선거인 1828년 대선에서 애덤스-잭슨 리턴매치가 성사되었고, 4년 전과 달리 유권자들 앞에 놓인 선택지가 ‘모 아니면 도’로 단순화되었으며, 선거인단 역시 단 두 명의 후보를 대상으로 투표를 하게 되어 구조적으로 ‘당선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조건이 갖춰졌다. 잭슨은 유권자의 직접투표에서 과반수인 64만여표를 얻어 50만여표를 얻은 애덤스를 12% 차로 따돌렸으며 (잭슨 56%, 애덤스 44%)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안정적인 과반수를 확보해 (잭슨 178, 애덤스 83) 마침내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처럼 분열, 이합집산, 매관매직/매표와 분당이라는 현대 정치의 클리셰를 모두 드러낸 두 차례의 대선을 계기로 미국 정계는 안정적인 양당 체제로 재편되었으며 이때 형성된 민주당/공화당의 양자 대결 구도는 아직까지 보수되지 않은 미국 헌정의 결함을 가까스로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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