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tor : Daeguen Lee

(※ 이 글은 WCCFTech의 원문 (링크) 을 번역한 것입니다.)

 

 

 

인텔, AMD, 엔비디아에 관한 놀라운 4가지 역사적 사실들

 

인텔, AMD, 엔비디아는 명실상부한 실리콘밸리 PC부품 제조사의 3대장이다. 이 글에서는 그들의 얼키고설킨 이야깃거리 많은 과거를 간단히 짚어보며 그중 4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왼쪽부터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제리 샌더스)

 

인텔, AMD, 엔비디아가 있기 전 과거로 돌아가보자. 이 모든 역사는 1950년대와 60년대 반도체 혁신을 주도하던 하나의 회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회사는 실리콘밸리의 컴퓨터 혁명을 태동시켰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이다. 세계 최초의 IC가 태어난 것도, 훗날 무어의 법칙이라 이름붙여지는 고찰이 행해진 것도 페어차일드 그룹의 지원과 로버트 노이스의 천재성에 기인했던 것이다. 이 간단한 역사적 사실은 첫번째 놀라운 사실을 이끌어낸다.

 

 

1. 인텔과 AMD의 창업자는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 동기였다.

 

사실이다. 인텔과 AMD의 창업자는 그들이 다니던 회사를 떠나 창업을 결심하기 전까지 같은 직장에서 일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페어차일드는 굉장히 큰 그룹이었고 그에 비해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는 상위 계열사인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드 인스트루먼트의 하위조직에 불과했다. 60년대 후반 들어 회사 내부의 기류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는데, 시장에서의 리더십과 혁신을 주도하는 회사로서의 이미지가 퇴색되어간 것이다. 불행히도 회사 내에서도 혁신가들이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못 받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모회사인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드 인스트루먼트로 흘러들어갔고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에 돌아온 수입은 거의 없었다.

 

로버트 노이스는 이러한 사실에 염증을 느꼈고, 또다른 동료인 고든 무어에게 함께 퇴사하자고 부추겼다. 결국 그들은 1968년 인텔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의 월드와이드 세일즈 매니저라는 중역을 맡고 있던 제리 샌더스도 일련의 상황에 관해 고위 경영진과 마찰을 겪은 끝에 일년 후 퇴사하게 된다.

 

당시 젊고 자신만만한 엔지니어였던 제리 샌더스는 그의 능력이 고위 경영진에게 위협으로 느껴질 만큼 유능했으며 결국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퇴사 후 그가 설립한 회사가 바로 AMD이다.

 

 

2. 인텔의 가장 성공적이고 두번째로 오래 재임한 CEO 앤드류 그로브의 철학은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였다.

 

로버트 노이스는 인텔이 설립된 바로 그 날 앤드류 그로브를 채용한다. 그로브는 인텔의 창업자가 아닌 첫 직원으로, 헝가리 국적의 유대계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세계 2차 대전의 나치 점령으로부터 생존한 개인적인 이력을 갖고 있다. 그가 20살이 되던 해에 헝가리는 공산화되었고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학위를 마치며 그는 화공 엔지니어가 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앤드류 그로브를 그의 아이돌로 삼았으며 가능한 한 자주 그와 만나려 했다)

 

그로브는 헝가리에서 보낸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당시 나는 스무살이었고, 그때까지 헝가리는 파시스트 독재 / 독일 군정 / 소련 군정을 차례로 겪었습니다. 이후 전쟁이 종결되고 아주 잠깐 민주주의가 스쳐 지나갔지만 뒤이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그에 저항하는 민중봉기와 총칼에 의한 억압이 이어졌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고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구금/억류되었으며 고작 이십만명 정도가 서방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로브는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인텔의 (CEO 아닌) 월급쟁이 사장이었으며, 1987년 고든 무어의 뒤를 이어 인텔의 CEO직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화공 엔지니어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제품의 생산 쪽에 고도로 집중했다. 그는 인텔의 제조공정 개선과 생산설비 확장을 이끌었으며 그 결과 인텔의 양산 능력은 세계 최대 수준이 되었다.

 

그는 8피트 x 9피트 (약 2.4m x 2.7m, 2평 가량) 밖에 되지 않는 직사각형 집무실에서 근무했으며 독립된 주차공간도 없이 직원들 사이에 섞여 차를 대곤 했다. 1998년 전립선암으로 사임하기까지, 12년 동안 CEO직에 있으면서 그는 시가총액 40억 달러이던 인텔을 거의 2000억 달러로 250배 이상 키우며 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회사로 만들어냈다.

 

 

3. AMD의 창업자이자 최장기간 재임한 CEO인 제리 샌더스의 철학은 "인재가 먼저, 수익은 그 다음" 이었다.

 

샌더스는 시카고 남부 출신으로, 어린 형제들이 아주 많았기에 거의 친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또한 그는 샌더스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는데, 할아버지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었다. 샌더스의 성적은 매우 우수했고 그는 장학금을 받아 University of Illinois (UI) 에 진학해 화학공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자공학으로 전과했다.

 

 

"더 많이 투자해 더 많이 생산하든지, 아니면 혁신하라" 이것은 샌더스의 잘 알려진 어록 중 하나로, 혁신을 비즈니스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그의 철학을 대변한다. 왜냐면 갓 창업한 사업가에게 전자는 불가능한 옵션이기 때문이다. (여느 대형 회사들만큼 투자해 생산하기란 불가능하다)

 

2002년 스탠포드 대학의 '실리콘 제네시스'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나는 UI에 진학해 화공과 학생으로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왜 화공과였냐고요? 내 지도교수 (placement counselor) 가 화공 엔지니어들이 다른 분야 엔지니어보다 돈을 많이 번다고 알려 주었거든요. 어린 시절 저는 가난했고 그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기에 돈을 많이 벌어 풍족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내게는 열 두명의 동생들이 있었고 나름대로 풍부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풍부함 속에 돈은 없었죠.

 

따라서 화공과로 진학은 했습니다만, 당시 화공과는 인문대학 내에 소속되어 있었고 진정한 엔지니어링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기에 슬펐고 학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전자공학과로 전과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에 대해 신께 감사드립니다."

 

샌더스는 이후 더글러스 에어크래프트 컴퍼니에 취직했다가 모토롤라로, 다시 1961년 로버트 노이스에 의해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샌더스는 노이스에 대해 "내가 여지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하고, 나랑 마음이 잘 맞고, 매력적이고, 하여튼 똑똑한 사람이다" 라고 평가한 바 있다.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의 월드와이드 세일즈 매니저로 재직하며 샌더스는 입사원서를 낸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 반드시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다녀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샌더스에 따르면 영업사원은 '아주 공격적인 드라이버여야 하기 때문' 이었다. (sales reps had to be aggressive drivers)

 

샌더스는 1969년 AMD를 설립했고 그때부터 2002년까지 회사의 사장 겸 CEO로 재직했다. 그가 재직하는 동안 AMD의 시가총액은 150만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무려 2000배 이상 성장했다. 샌더스는 매우 카리스마있고 직설적인 CEO였지만 동시에 직원들의 재능을 매우 아꼈다. 샌더스 하에서 AMD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자사주를 분배한 회사로 기록되었고, 초과이익 공유제 (profit sharing employee compensation program) 를 시행한 첫 회사가 되었다. 그의 철학인 "인재가 먼저, 수익은 그 다음"은 그가 AMD에서 은퇴할 때까지 AMD의 신입사원들에게 출력되어 나누어졌다고 한다.

 

 

4.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CEO 젠슨 황은 AMD에 근무했었다.

 

젠슨 황은 16살의 나이로 오레곤 주립대학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가 졸업했을 때 그는 21살이었고 그의 랩 동료였던 로리 황과 이듬해 결혼하게 된다. 1993년 엔비디아를 창업하기 전 그는 LSI Logic을 비롯해 몇몇 회사에서 근무했는데, 그 전 직장은 AMD였다. 젠슨에 따르면 프로세서를 설계하는 일은 너무 어려워서, LSI Logic이 당시 추진하던 칩 디자인 툴 개발 프로젝트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이직했다고 한다.

 

 

황은 늘 성공을 위해 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을 품고 지냈다고 한다 : 즐길 수 있는 일인가? 가치있는 일인가? 어려운 일인가?

 

황에 따르면, 학창시절 그의 랩에 AMD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포스터에는 당시의 게임 콘솔에 탑재되는 CPU의 슬라이스 이미지가 있었고 그때 그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라는 학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졸업하자마자 AMD에 취직하게 된다.

 

엔비디아의 사장 겸 CEO로 그가 재직하는 동안, 엔비디아는 1999년에 상장되었고 시가총액은 20배 이상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