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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er DG

문창극 사태에 관한 단상

Author : Daegue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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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총리는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이 절차는 실무적인 레벨에서 대통령이 후보를 지명하고, 국회에 총리후보 인사청문요청안/임명동의안(간단히 "총리 임명안"이라 하자)을 제출하며 국회는 이에 의거해 인사청문회를 개최, 청문경과보고서를 참고해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을 표결하는 단계들로 구분된다. 한편 헌법은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 한다"고 규정해 두었다. 앞서 살펴본 총리 임명절차에 있어 대통령이 총리후보를 "지명"한 행위는 문서가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실무 조치로 총리 임명안을 참모들이 작성, 이를 국회에 발송하기 앞서 행정부의 수장으로써 대통령이 결재하는 것(기관간에 서류가 오갈 때 기관을 대표해 발송하는 서류를 그 기관장이 결재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은 상술한 모든 행위의 주체가 대통령 그 자신임을 확인하는 절차에 다름없다.

 

중앙일보 주필 출신의 문창극씨가 총리후보에 지명된 날로부터 오늘, 그가 총리후보 지위를 내려놓기까지의 2주간 벌어진 일련의 논란을 "문창극 사태"라 뭉뚱그리자면 이 "사태"의 본질이 다른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 문창극씨를 후보로 지명한 데 있다는 것은 너무 자명해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기술적으로는 참모가 작성한 서류를 대통령이 서명해 국회에 보내는 (속된 말로 하자면 대통령이 서류 작성을 참모에게 "짬 시킨" 것쯤 되겠다) 모양일지언정 그 본질은 "참모가 총리 임명안을 작성했다"는 대목이 아니라 "대통령이 총리후보를 지명했다"는 대목에 있단 얘기다. 어디까지나 본질은 절차의 맥락에 있지 지엽적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지극히 기술적인 절차인 "결재"를 차일피일 미룸으로써 순식간에 "대통령의 결재 여부" 그 자체를 거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선택지로 격상시키는 한편 자신을 그 앞에 세워 놓았다. 이 극적인 연출을 통해 대통령은 마치 내키지 않는 총리의 임명을 (설마 참모로부터?) 강요받는 뉘앙스를 풍겼으며 이 구도 하에서 대통령이 총리 임명안의 결재를 거부하는 것은 곧 국민이 싫어하는 총리의 임명을 막아서는 "거룩한 통치행위"쯤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실은 한발 더 나아갔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뜯어말리는- 표본이 아닌가.

 

이미 문창극씨를 총리후보로 지명한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총리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한 대통령의 결단만이 대중들에게 안도를, 그중 누군가에겐 칭송을 자아낼 뿐이다. 아니다, 엄밀히 말해 책임이 돌아간 곳이 있기는 하다. 바로 "대통령의 뜻"을 받들었던 참모들이다. 비록 모든 여론주체들이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그리고 대통령의 비서실장에 대한 신임이 너무도 깊어 그의 퇴진이 실제로 대통령에게 큰 상처가 되는 것일지언정, 거꾸로 이로써 대통령은 적당한 시점에 비서실장을 경질하는 것만으로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면죄부를 이미 받아든 것이다. 이래서야 대통령의 유체이탈을 막을 방법이 없다.

 

자신이 지명한 총리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하는 것과 그 총리후보에 대한 자신의 지명을 철회하는 것. 이미 국회의원 과반수가 반대할 것이 확실해 총리 임명이란 해피엔딩이 불가능해진 문창극 사태의 결말로 대통령에게 주어졌던 두 시나리오다. 후자의 경우 대통령 스스로의 판단을 공개적으로 뒤집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크다. 전자는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전자의 실행은 필연적으로 대통령 자신의 유체이탈, 왼손이 한 일을 뜯어말리는 오른손의 자세, 다시 말해 책임 회피를 전제로 한다. 대통령 개인의 "판단력에 의문이 제기될지도 모르는" 후자의 직접적인 위협에 비해 (대통령, 혹은 집권 세력이) 당면할 부담의 강도는 덜할지 모르나 책임회피의 본을 보임으로써 야기될 사회적 비용은 보다 거시적인 레벨에서 "신뢰"를 해치는 것으로 지불된다.

 

어쨌든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대통령은 전자를 선택했다. 의원 시절부터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으로써 사회적 신뢰 형성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던 대통령의 선택으로는 퍽 아이러닉하다. 총리후보 지명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재확인하고, 이를 철회함으로써 결자해지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기대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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